단종(端宗)은 서기 1441년(세종 23)에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단종(端宗)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다.
세월이 흘러 세종(世宗)이 죽고
서기 1452년 즉위한지 2년만에 아버지 문종(文宗)마저 병으로 죽으면서
엉겁결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단종(端宗)의 나이가 열 두살이었다.
즉위한지 1년만에 숙부(叔父)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일으킨 계유정란(癸酉靖難)으로 유명무실한 왕으로 전락하고 만다.
계유년(癸酉年)에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이,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결탁해 반역을 도모하려 한다는 핑계로 정적(政敵)들을 제거했는데,
역사(歷史)는 이 사건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한 사실상 쿠데타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압력으로 허울뿐인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단종(端宗)은,
세종(世宗)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동생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집에 연금 상태로 머물게 된다.
그러다가 서기 1457년 6월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의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이
단종(端宗)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단종(端宗)은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된다.
이때 단종(端宗)의 나이 열 일곱이였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영월(寧越)로 유배된 단종(端宗)은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으로 함께 유배된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계획했다가 발각 되자,
노산군(魯山君)에서 일반 서인(庶人)으로 또다시 강등 되고
결국에는 사약(死藥)을 받는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정(朝廷) 대신들이 노산군(魯山君)을 처형하라고 주장해 세조(世祖)가 이를 윤허(允許) 했는데,
사약(死藥)이 내려지자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승자(勝者)에 의해 쓰여진 역사(歷史)로 정확하진 않다.
때로는 정사(正史)보다 야사(野史)가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승자(勝者)의 과장되고 미화된 기록을 야사(野史)가 바로잡은 까닭이다.
이 사건을 야사(野史)에 보면 이러하다.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사약(死藥)을 받들고 영월(寧越)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구르며 다그쳤다.
금부도사(禁府都事)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端宗)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나와서
이곳에 온 까닭을 물었으나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대답을 못했다.
이를 눈치 챈 통인(通引) 하나가 스스로 거사할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단종(端宗)을 곁에서 모시는 자였는데,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단종(端宗)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는 앉은 좌석 창문 뒤쪽으로 가서 끈을 잡아당겼다.
일을 끝낸 통인(通引)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고,
단종(端宗)은 몸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와 그 자리에서 즉사 했다.
유배 3개월만인 그해 10월로 단종(端宗)의 나이 열 일곱이었다."
"그 후 단종(端宗)을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앞다투어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 했다.
이날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었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라고
당시의 상황을 리얼하게 적고 있는 책이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역사책(歷史冊)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다.
단종(端宗)의 사례에서 보듯,
조선(朝鮮)이 아무리 왕조(王朝) 국가라고는 하지만
힘이 없는 왕(王)의 즉위는 결국 정국(政國)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따라서 단종(端宗)의 사례는
보호받지 못한 왕권(王權)의 말로가 이처럼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게 그는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이곳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에서 짧은 생을 마감 했다.
시종과 시녀들이 기거하던 집으로 어소와 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단종(端宗) 어소(御所)
이곳 어소(御所)는
오랜 세월에 걸친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무너진 것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근거로 하여 재건(再建)한 집이다.
청령포(淸泠浦) 관음송(觀音松). 수령 약 600년
청령포(淸泠浦) 관음송(觀音松)은
단종(端宗)의 유배 모습과 두려움에 우는 소리까지 다 들었던 나무라 하여
전부터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렀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단종(端宗)께 사약(死藥)을 진어(進御)하고
한양(漢陽)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淸泠浦)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時調)가 찾는 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의 시조(時調)를 읇조리며
나도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를 떠난다.
천만리 머나면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때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천리 머나먼 길에서 어린 임금과 이별하고...
비통한 내 마음 어디에 둘 길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면서 밤길을 흘러가네...
이상으로 이번 동해안 여행을 마감한다.
언제 또 떠날지는 모르지만... 여행은 늘 설렘으로 시작하여 아쉬움으로 끝을 맺곤 한다.
그러기에 다음 여행이 또 기다려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