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지(雁鴨池)
깊어가는 서라벌의 밤...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보면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4년 2월 초에
“궁(宮)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라고 했다.
따라서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전후로한 시기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서기 674년 문무왕(文武王) 때 완성한 것으로 적고 있다.
안압지(雁鴨池)의 원래 이름은 "월지(月池)"이며 주변은 동궁(東宮)자리로
신라(新羅)의 태자(太子)가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중심이 되는 건물인 임해전(臨海殿)은
군신(君臣)들이
연회(宴會)를 열거나 귀빈(貴賓)을 접대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난 기록으로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성종(成宗)의 명(命)을 받아
노사신(盧思愼) 등이 조선(朝鮮) 각 도(道)의 지리(地理), 풍속(風俗) 등을 적은 책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고 알려진다.
이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못 이름이나 동궁(東宮)의 위치 등에 의문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문무왕(文武王)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 라고 하여
그 조성(造成)이 신선사상(神仙思想)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1975년 3월부터 1986년 12월까지
연못과 주변 건물지(建物址)의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이 때 석축호안(石築護岸)으로 둘러싸인 연못과 3개의 섬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연못 서쪽의 못가에서
5개의 건물지와 서남쪽으로 연결되는 건물지들이 밝혀졌다.
또한, 연못 안팎에서 출토된 온전한 유물만도 1만5천 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 출토되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생활용품(生活用品) 등을 비롯하여
금동불상(金銅佛像)및 금동제품(金銅製品)과 당시의 건축양식(建築樣式)을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는
목조건물(木造建物)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여인네들이 사용했던 수많은 장신구(裝身具)와 주사위, 목선(木船)이 발견되었으며
남성(男性)의 성기(性器) 모형 놀이개와
나무를 엮어 글자를 쓴 목간(木簡) 등도 출토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안압지(雁鴨池)의 중심 건물이었던 임해전(臨海殿)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는
신라(新羅)의 국운(國運)이 이미 기울어진 때인 서기 931년 경순왕 5년에
"왕(王)이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맞아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신라(新羅) 56대 마지막 왕(王)인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 왕건(王建)을 위해 이곳 월지(月池)에서 연회를 배푼 것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기록이 됐다.
출토유물(出土遺物)들의 시대(時代)로 미루어 보아도
10세기경까지는 왕실(王室)의 비호(庇護)를 받으면서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雁鴨池)는...
신라(新羅)를 고려(高麗)에 넘겨주는 서글픈 연회(宴會)를 마지막으로
1천 년 영욕(榮辱)이 격랑(激浪)의 세월속에 묻혀버렸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기러기와 물오리가 저 연못 가득 노닐었다는 안압지(雁鴨池).
아주까리 등잔(燈盞) 밤새도록 불 밝히고...
궁녀(宮女)들의 간드러진 교성(嬌聲)으로 흥청이던 동궁(東宮)이었건만,
술내음 풍악(風樂)소리 멎은지는 아득한 옛날이구나...
고요한 연못 속엔 농익은 세월만 채곡채곡 잠이들고,
밤을 잊은 여객(旅客)들만 못가를 서성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