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세조길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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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세조길을 따라 걷다.


법주사(法住寺)에서 문장대(文藏臺)를 오르는 길 옆으로 잘 정돈된 오솔길을 내고
야자열매 껍질로 만든 푹신한 매트까지 깔아놨다.
이 길은 세심정 근처까지 난 길인데,
길이가 약 2.3km 정도의 탐방로이다.
속리산 식수원(食水源)인 저수지를 오른편으로 끼고서 잘 만든 데크길을 따라 소나무숲으로 이어져 있다.
속리산에 오면 늘 콘크리트길만 걷다가 푹신한 오솔길을 걸으니
기분마저 상쾌하다.
특히 맑고 시원스런 저수지 옆을 따라 느릿느릿 걸으며
사색하는 기분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다음은
오리숲에서 법주사와 세조길 그리고 순조 태실까지를 담아 본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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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일주문(一柱門)을 보면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호서지방에서 제일가는 절집이란 뜻인데...
호서(湖西)란 말이 좀 궁금하다.


호서(湖西)를 글자대로 풀면 호수(湖水) 서쪽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호수(湖水)"는 어떤 물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만들어진 저수지(貯水池)인

제천(堤川)의 "의림지(義林池)"를 기준으로 서쪽지방을 가리키는 것이 호서지방(湖西地方)이고,

호남지방(湖南地方)은
역시 삼한시대(三韓時代)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저수지 기준으로 정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호서지방은

현재의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충청북도, 세종특별자치시 일대의 지역이며,
호남지방은 금강(錦江) 이남인 전라도 전역을 아우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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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명칭의 유래는 모두 중국에서 전해진 지명(地名)을
우리땅에 어거지로 붙인 이름들이다.
중국(中國)은

중원의 "동정호(洞庭湖)"를 기준으로 호남(湖南), 호서(湖西), 호북(湖北) 등의 지명(地名)을 지었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우리나라의 영동지방이나 영남지방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을 기준으로 해서 동쪽은 영동지방(嶺東地方)으로

남쪽은 영남지방(嶺南地方)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 역시 중국 화북(華北)의 "태행산맥(太行山脈)"을 기준으로
산동(山東), 산서(山西)로 나누었던 것을 모방한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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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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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捌相殿)
목조(木造) 5층탑으로 국보 제55호이다.
팔상전(八相殿)은

부처의 일생을 나타내는 팔상도(八相圖)를 전시한 법당을 말하는데,
팔상도가 있는지는 들어가 보질 못해 알 수는 없었고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니

사면에 작은 부처 조각상만 빼곡하게 층으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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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은

보통 "여덜 팔(八)자"를 써서 팔상전(八相殿)이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법주사의 팔상전에는 "깨트릴 팔(捌)"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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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련지(石蓮池)
국보 제64호로 지정된 유물이며

신라 33대 성덕왕 19년(720)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것은 돌을 깎아 만든 조그만 연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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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사자 석등(雙獅子 石燈)
국보 제5호로 지정된 유물이다.
신라 33대 성덕왕 9년(720)에 건립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전에는 이 석등을 보면서 재미있게 만들어진 석등으로만 생각을 했고

국보(國寶)로 지정된 건 알고 있었다.


이번에 이 석등을 자세히 보면서 갑자기 야릇한 궁금증이 생겼다.

사자를 형상한 석등이라~?

호랑이라면 또 몰라도~
사자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동물이며
그것도 한정된 지역인 아프리카 사바나 평원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인데...
어찌하여 당시 석공(石工)은

본 적도 없는 사자 형상의 석등을 만들었을까~?.


이 석등(石燈)이 만들어진 당시의 통일신라(統一新羅) 때는
사자란 동물의 이름을 들어보았거나 실제로 본 사람도 거의 없던 시절이다.
더군다나 사자가 살고있는 머나먼 이역만리 아프리카를 다녀왔던 석공(石工)이나
승려(僧侶)가 있었다고는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가장 멀리까지 여행을 했던 스님의 기록으로는 신라의 승려 "혜초(慧超)"가 있었다.
그는 당나라를 거쳐
천축국(天竺國) 즉
오늘날의 인도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두루 답사했던 스님이다.


중국의 고비사막에 있는 거대한 불교(佛敎) 유적인

돈황(敦惶)의 막고굴(莫高窟)에서,
프랑스 탐험대를 이끈 폴 펠리오가 1878년

밀봉된 석굴 속에서 고대 유물들을 무더기로 발견하였다.


그 중에 신라의 승려 혜초(慧超)가 간다라지방을 다녀오며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란 제목의 두루마리 기행문(紀行文)이 섞여 있어서

그의 이름과 함께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중국의 명산 구화산(九華山)에 들어가

스님이 된 신라의 왕자(王子) 출신인 "김교각(金喬覺)"이 있는데

그는 아에 스스로 몸을 불사른

"등신불(等身佛)"로 알려진 스님이다.

그리고는 지옥행(地獄行)을 막는다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되어

불교 신도들에게는 영원한 구세주(救世主) 부처(佛陀)로 추앙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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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중요한 것은

이역만리 떨어진 신라땅에서 사자의 모습이라니...
특히 숫사자의 갈기 모양까지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등(石燈)을 만들었다는 것은
엄청난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쌍사자 석등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것을 도데체 어떻게 이해를 할 것인가~??."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나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내 생각이 맞든 틀리든 간에 나는 내 추론을 믿고 싶다.


이 석등이 만들어진

당시의 통일신라 시대에는 이미 서역(西域)과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중국의 번화한 무역 도시 양주(揚州)를 거쳐

 뱃길로 청해진(淸海鎭) 즉 지금의 완도(莞島)를 통해 왕래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현재의 광주광역시인 당시의 무진주(武珍州)와

신라의 서라벌(徐羅伐)을 오가며 무역을 했는데,
이들이 바로 아라비아의 물건들을 신라까지 유통시킨 장본인들이다.


경주의 천마총(天馬塚) 출토 유물들을 보면
중국 당(唐)나라 때의 찻주전자를 비롯하여 정교한 놋대접과
서역에서 건너온 물건인 "유리잔"과 유리구슬들이 여러점 출토 되었는데,
이 유리 제품은 아라비아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이다.
그러니까 당시
왕실과 귀족층에서는 중국의 비단과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서역의 장식품들과 공예품
그리고 아라비아의 거울과 유리 제품,

향신료(香辛料)까지도 널리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사자를 조각하거나 수를 놓은

아라비아의 술잔이나 보석들을 비롯한 카패트들이 중국을 거쳐
신라까지 유통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들 제품에 장식된 사자 모형을 모태로 하여,
석공(石工)이 이런 멋진 석등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불교(佛敎)가 처음 태동한 인도의 아잔타나 간다라 지방은
인도 코끼리와 티벳트 원숭이, 뱅골 호랑이 등은 살고 있지만 사자는 서식하지 않은 지역으로,
사자가 살고있는 아프리카까지는 지리적으로도 수만리나 떨어져 있다.
그런고로 사자는 사실 초기의 정통 불교와는 거리가 먼 동물이다.


두 마리의 숫사자가 석등을 받혀 들고있는 형상도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라고 보여지는데,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사자의 근육질 표현과 좌우 대칭
그리고 갈기의 모양까지 조각한 정교한 미적(美的) 형태는 석공이 상상해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제품에 세겨진 문양을 그대로 본 떴을 것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은
살펴보면 볼 수록 감탄이 절로 나는 수준 높은 작품임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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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확(鐵鑊)
보물 제1413호로 지정된 유물이다.
신라시대 성덕왕 때에 주조되었다고 구전되어 오는 것으로,
본래는 냇가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의 무쇠솥이다.
이 쇠솥은 크기가 하도 커서
한꺼번에 승려 3,000명이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려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기도 했다고 전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어느 시기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물(鑄物)로 만든 솥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할 뿐만 아니라,
형태 또한 세련되어

당시의 주조 기술과 미적 감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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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수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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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새 동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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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근에서 경업대와 순조 태실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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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를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세심정에서 오른쪽의 경업대 방향으로

200여 미터를 오르면
순조대왕태실(純祖大王胎室)을 가리키는
이정표(里程標)를 만나게 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쪽을 보면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가는 다리나 그 흔한 돌다리도 없다.
대충 조심하면서 개울을 건너면
마치 산짐승들이나 다니는 길처럼 낙엽 덮인 희미한 오솔길이
가파른 산등성이를 향해 지그재그로 뻗어 있는데,
이 가파른 급경사 길을 따라 300여 미터를 턱에 숨이 차도록 오르면 능선 오른쪽 소나무 숲에
태실비(胎室碑) 상부가 자그마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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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純祖) 태실(胎室)

태실비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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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실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태항아리를 꺼내어 창경원으로 옮겨가면서 훼손된 바 있으며,
현재는 석조물과 태실비만이 원형대로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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