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색 짙은 만추(晩秋)에... 산사(山寺)를 찾다.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
가야산(伽倻山) 전경(全景)
마치 눈이 내린 모습 같으나 전부가 흰색의 화강암으로 된 바위들이다.
가야산(伽倻山)은 기묘한 바위들이 늘어선 만물상(萬物相)이 유명한데...
시간이 부족하여 올라가지는 못했다.
홍류문(紅流門) 매표소
자운대율사((慈雲大律師) 부도탑(浮屠塔)
한국불교(韓國佛敎)의 율맥(律脈)을 이어받아 율풍(律風)을 크게 일으킨 큰스님으로
불교계에서는 널리 존경을 받는다.
해인사(海印寺) 홍제암(弘齊庵)에서 세수(世壽) 82세, 법납(法臘) 65세로 입적(入籍)했다.
성철(性徹)스님 부도탑(浮屠塔)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
임제종(臨濟宗)을 개종(開宗)한 임제(臨濟)의 후예(後裔) 선사(禪師)인 "유신선사(惟信禪師)"가
노자(老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사상(思想)을 해설하여 교시(敎示)를 내린 적이 있었다.
이것을 성철스님이 인용하여
종정(宗正) 때 법어(法語)를 내려,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해졌다.
유신선사(惟信禪師)의 설법(說法)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삼십 년 전 참선(參禪)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休息處)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見解)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境地)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자운대율사((慈雲大律師) 부도탑(浮屠塔)
해인(海印)이란...
부처의 지혜(智慧)로 우주(宇宙)의 모든 만물(萬物)을 깨닫고 통달(通達)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 즉 법(法)을 관조(觀照)한다는 것은
바다가 만상(萬象)을 비추는 것과 같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온 세상이 진리(眞理)의 물결로 가득한 곳,
부처의 가르침 곧 석가여래(釋迦如來)의 말씀으로 넘쳐나는 바다,
즉 해인(海印)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이다.
불교(佛敎)에는
세 가지 보물(寶物)이 있는데...
"부처(佛)" 그리고 부처의 "가르침(法)"과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승려(僧)"를 말한다.
이를 "삼보(三寶)"라 하여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 중에서 이러한 세 가지 보물(寶物)의 으뜸 역할을 하는 사찰로
불보사찰(佛寶寺刹)로는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승보사찰(僧寶寺刹)로는 순천의 "송광사(松廣寺)",
법보사찰(法寶寺刹)로는 이곳 합천의 "해인사(海印寺)"를 꼽는다.
불가(佛家)에서 법(法)이란...
부처님의 말씀,
즉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지혜(智慧)를 의미한다.
해인사(海印寺)는
고려시대(高麗時代)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상징으로 불리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600여 년이나 고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사찰(法寶寺刹)의 명성(名聲)을 얻게 되었다.
대장경(大藏經)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할 필요를 느껴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暗誦)의 방법에 의하여 이른바 "결집(結集)"이 이루어 진 것이다.
본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은
부처님의 법력(法力)으로 몽골(蒙古)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제작 되었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인 서기 1237년에 착수하여 14년 만인 서기 1251년 완성했다.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팔만(八萬) 매가 된다 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하는데,
완성 당시 경판(經板)의 총 수는 8만 1,137매였으며 이 후 몇십 매가 더해져
현재 보관되어 있는 것은 8만 1,258매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까지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었던 것을
해인사(海印寺)로 옮겼다.
따라서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해인사대장경(海印寺大藏經)"으로 불렸으며,
현재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으로 불린다.
해인사(海印寺)로 옮긴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異論)이 있으나 서기 1398년인 태조(太祖) 7년에 옮겼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몽골(蒙古)은 1차 침입인
서기 1231년부터 서기 1258까지 무려 9차례나 고려(高麗)를 침입했다.
그들은 몽골(蒙古)의 말을 듣지 않고 버티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權力)을 휘두루던 "최씨(崔氏) 무신정권(武臣政權)"을 결국 무너트렸다.
또한 수많은 인명을 살상(殺傷)했으며
문화재(文化財)란 문화재는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72명의 관리(管理)를 파견하여
고려(高麗) 조정(朝廷)을 감독하며 철저하게 고려(高麗)를 짓밟았다.
심지어 7차 침입 때는
2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노예(奴隸)가 되기도 했다.
대장경(大藏經) 경판(經版) 제작(製作)은
부처님의 법력(法力)으로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몽골족(蒙古族)의 침입을 막고자 총력을 기울인,
그야말로 국운(國運)을 건 사업이었지만...
몽골은 한반도 끄트머리까지 달려가
신라(新羅) 때 창건한 서라별의 대가람(大伽藍) 황룡사(皇龍寺)까지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제주도까지 쫏기며 끝까지 저항하던
삼별초군(三別抄軍)을 완전 제압하고 나서야 전쟁을 끝냈다.
고려(高麗)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몽골(蒙古)의 속국(屬國)이 되어 엄청난 조공(朝貢)을 바치며 굽신겨려야 했다.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만들었고, 또 지켜낸 보물(寶物)이다.
이런 가치가 인정되어
훗날 세계적(世界的)인 문화유산(文化遺産)으로 남았지만,
백성들의 불심(佛心)이 부족한 탓인지...
부처님의 법력(法力)이 모자란 탓인지...
28년 동안 몽골(蒙古)이 고려(高麗)를 철저하게 파괴및 유린하는 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海印寺 聖寶博物館) 앞 삼층석탑(三層石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