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국(中國) 안후이 성(安徽省) 여행(旅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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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후이 성(安徽省) 여행(旅行)

옛 휘주(徽州)의 대표적인 부촌(富村)...
"잠구민택(潛口民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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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나라 말기(末期)

나씨(羅氏) 시조(始祖)로 알려진 문창공(文昌公)과, 추은공(秋隱公)이
"황소의 난(黃巢之亂)"을 피해 강서(江西) 남창(南昌)에서
이곳 황산(黃山)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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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촌락을 설계하고 세운곳이

여기 잠구민택(潛口民宅)이라고 알려져 있다.
"잠구민택(潛口民宅)"은 말 그대로 "잠구마을의 일반 백성들의 집"이란 뜻이다.
큰 대문을 들어가면 3개의 큰 거리와 99개의 작은 골목이 있다고 하는데,
전부 둘러보지는 못했고

일부 몇 채의 가옥(家屋)만 들어가 내부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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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형태는

팔괘(八卦)와 풍수(風水)를 따라 지어진 촌락이라고 한다.
팔괘(八卦)는

고대(古代) 주(周)나라에서 유래한 주역(周易)과 관련된 기호체계(記號體系)인데,
우리나라 태극기(太極旗)의 밑바탕이 된 것도 팔괘(八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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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위에서 언급한

"황소의 난(黃巢之亂)"에 대하여 짤막하게 알아보고 가고자 한다.
지난 학창시절 역사 시간이나 책에서 한 번 쯤 들어 봄직한 이름 일 터인데,
"황소"는 밭 가는 소가 아닌,

사람 이름으로

소금 장사로 거부(巨富)가 된 당(唐)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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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나라 말기(末期)

 "안사의 난(安史之亂)""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가까스로 진압되자,
조정(朝廷)에서는 바닥 난 국고(國庫)를 채우기 위해 대대적인
조세제도(租稅制度) 개편에 나선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그동안 민간업자에 의해 자유로이 매매되던 소금을 전매품(專賣品)으로 지정하고
국가에서 일괄 소유및 판매하기에 이르자 소금값이

순식간에 30배까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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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소금을 살 돈이 없어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백성들이 태반이며 불만이 팽배해지자,
몰래 소금을 판매하는 밀매업자까지 생겨났다.
조정(朝廷)에서는

조세(租稅)가 줄어들 것을 걱정하여

밀매업자를 "염적(鹽敵)"이라 칭하고 엄벌로 다스리자
밀매업자들은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스스로 무장하여 조정(朝廷)에 대항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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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매업자들의 반란(叛亂)과 조정의 토벌(討伐)은 계속 되고...

반란군(叛亂軍)의 세력은

일반 서민들까지 합세하여 엄청난 민란(民亂)으로 번져간다.
소금장수 두령(頭領)이던 왕선지(王仙芝)는 호북(湖北)으로 진격하고
또다른 두령(頭領)인 황소(黃巢)가 이끄는 봉기군(蜂起軍)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조정(朝廷)을 압박한다.
그런데 호북으로 진격하던 왕선지(王仙芝)가

황매(黄梅)에서 관군(官軍)과 격전 중 화살을 맞고 어이없이 전사(戰死)하자,
나머지 봉기군들이 전부 황소(黃巢) 휘하로 들어가 세력을 키우며 강력히 저항한다.
이것이 이른바 소금장수 황소(黃巢)가 이끄는 민란(民亂)인

"황소의 난(黃巢之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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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60만 대군(大軍)으로 불어난 봉기군(蜂起軍)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황제(皇帝)가 있는 수도 장안(長安)에서 가까운 낙양(洛陽)을 접수한다.
겁에 질린 황제(皇帝) 희종(僖宗)은
황궁(皇宮)을 버리고

서천(西川)으로 도망을 치고,

황도(皇都)에 남아있던 조정(朝廷) 대신(大臣)들은
황소(黃巢)를 찾아와 앞다투어 투항하자,

황소(黃巢)는 의기양양(意氣揚揚)하여
황궁(皇宮)이 있는 장안(長安)에 무혈입성(無血入城)을 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황제(皇帝)라 칭하고

국호(國號)를 대제(大齊)라 하고 연호(年號)까지 만들어 금통(金統)이라 정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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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고위(高位) 관료(官僚)와 부호(富豪)들의 재산(財産)을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민심(民心)을 안정(安定)시키는데 힘을 쏟았으나,
서천(西川)으로 도망을 친 황제(皇帝)를 제거하는데 소홀했던 것이 결국에는 큰 화근(禍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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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황제(皇帝)를 중심으로

세력(勢力)를 규합한 관군(官軍)은 장안(長安)으로 재 진격을 하는데...
승리에 도취하여 광분(狂奔)에 흥청이던 봉기군(蜂起軍)들은 급격히 결속력이 약화된다.
그리하여 점령했던 장안(長安)을 관군(官軍)에게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내어주고는 남전(藍田)으로 후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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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관군(官軍)과의 격전에서

사기(士氣)를 잃은 봉기군(蜂起軍)들은 연전연패(連戰連敗)를 당하자,
황소(黃巢)는

태산(太山)의 낭호곡(狼虎谷)까지 도망을 치다가 더이상 갈 곳이 없음을 알고는

그 곳에서 자결(自決)로 생을 마감한다.
민란(民亂)으로

국력(國力)을 완전히 소진한 당(唐)나라는 멸망(滅亡)의 길로 급속히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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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一說)에는

당(唐)나라 유학자(留學者)인 최치원(崔致遠)이 황소(黃巢)를 꾸짖는 격문(檄文)을 써서 보내자,
황소(黃巢)가 격문(檄文)을 읽다가 벌벌 떨며 의자에서 떨어져
투항(投降)했다고 하는데...
이는 과장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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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치원(崔致遠)은 18세의 나이에
당(唐)나라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科擧)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빈공과(賓貢科)"에는 소위 신라(新羅) 3최(三崔)라고 불리는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최인연(崔仁渷) 등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신라(新羅) 유학생들이 합격했던 시험(試驗)이었다.
빈공과(賓貢科)는

범 국가적(國家的)으로 실시하여 최고의 인재(人才)를 뽑아 조정(朝廷)의 관리(管理)로 임용하는
진사시(進士試) 과거시험(科擧試驗)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특별과(特別科)의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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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나라 조정(朝廷)은 어지러운 국난(國難)을 타개하기 위해,
변방(邊方)의 소국(小國)에서 유학(留學)을 온 학생들을 상대로 그들만의 과거(科擧)를 통해

인재(人才)를 선발하여,

전쟁터의 관군(官軍) 막사에서 사무(事務)를 보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을 했다.
종사관(從事官)은 장수(將帥)의 명(命)을 받아 문서(文書)를 작성하고
통역(通譯)을 하는 일을 주로 했던 종6품(從六品)에 해당하는 낮은 관직(官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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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적군(敵軍)에게 항복(降伏)을 권유하는

격문(檄文)을 써서 보내는 것이

당시 격전지(激戰地)에서 종사관(從事官)이 하는 일반적인 엄무의 한 부분인 것은 당연했다.
최치원(崔致遠)도

관군(官軍) 장수(將帥)인 고변(高騈)의 막하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그의 명(命)을 받아 쓴 격문(檄文),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황소(黃巢)에게 보내게 되는데...
이 격문(檄文)을 본 황소(黃巢)가

벌벌 떨며 항복했다는 이야기는 과장 되도 너무 과장 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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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문집(文集)들을 볼 때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잘 지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나

황소(黃巢)를 굴복시킬 정도로 뛰어난 문장(文章)은 결코 아니었다.

중원(中原)을 휩쓸던 황소의 난(黃巢之亂)이 평정 되었는 데도,

여러 민란(民亂)으로 진이 빠진 당(唐)나라는 국운(國運)이 이미 기울어 회생(回生)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에 최치원(崔致遠)도 부랴부랴 신라(新羅)로 귀국하여
당시 변방(邊方) 고을이던

태인(泰仁), 함양(咸陽)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한다.
그러나 조정(朝廷)의 높은 벽과 부패(腐敗)한 정치(政治)에 염증(炎症)를 느껴

지리산으로 들어가
산사(山寺)에 머물다 세상을 뜬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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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다 보니...

쓸다리 없는 잡설(雜說)이 장황해졌는데...
머릿속에 잔상(殘像)으로 남아있던

황소의 난(黃巢之亂)에 대한 줄거리만 두서없이 나열한 내용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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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이곳 황산(黃山) 일대가
청(淸)나라 때 소금장사로 엄청난 재산(財産)을 축적한

포치원(鮑致遠)이란 인물이 위세을 떨치며 살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의 개인 정원(庭園)은

중국(中國) 안후이 성(安徽省) 일대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정원(庭園)으로 꼽히는데,
현재는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되어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둘러보지는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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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잠구민택(潛口民宅)으로 돌아가...
잠구민택(潛口民宅)에는 명(明)나라 때 건물들과

청(淸)나라 때 건물들이 공존하는데

대부분이 청(淸)나라 양식의 건물들이 현재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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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물이 부족하던 지역이기에 물 관리가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을마다 기본적으로 인공(人工) 못이 마을 중앙에 자리하기 마련인데,

이 마을에도 못이 마을 중앙에 있다는데 보지는 못했다.
이곳의 민가들은 고급 향나무 목재(木材)을 사용하여 집을 지었기에 지금도 향내가 풍겨나며,

 섬세한 조각품으로 장식을 한 부촌(富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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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은 모두 대문(大門)이 작고

천장(天障)과 문지방(門地枋)이 매우 높으며

창문이 한 두개에 불과하고 아주 작은 게 특징이다.
그리고 집집마다 빗물을 가두고 사용하는 지하(地下) 저장고(貯藏庫)가 있으며
시집 온 여인들은 평생(平生)을 집 안에서만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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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여 대를 이을 남자 아이를 낳으면

남정네들은 곧바로 집을 떠나는 것이 휘주(徽州)의 전통이라는데...
베이징(北京)이나 샹하이(上海) 등 외지로 나가 부친(父親)의 업(業)을 이어받아
상업(商業)이나 학문(學問)에 매진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휘주(徽州)에 적을 둔 거상(巨商)들이 유독 많았으며,
명, 청대에는 과거(科擧)에 수석으로 합격한,

즉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인원이 22명이나 휘주(徽州)에서 나왔고,
과거시험(科擧試驗)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의 벼슬을 받은 자가, 무려 1,100 명이 넘었다고 문헌에는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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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중국의 타 지역보다 10배나 많은 인재(人才)가 나온 것이라 하니...

휘주(徽州) 사람들의 열정에 그저 탄복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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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주(徽州)는 사방(四方)이 산으로 둘러쌓인 지역이라 농토(農土)가 적어
농사로 먹고 살기가 어렵다보니,

스스로 일할 나이가 되면 무조건 객지로 떠나는 전통이 생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집안에는 아녀자와 어린 아이들 그리고 하인들 뿐이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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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客地)로 떠난 남편은 돌아 올 기약이 없고...
독수공방(獨守空房) 홀로 평생(平生)을 지내야 하는 여인들은 긴 긴 날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야 했다.
얼마 안 되는 농사일이나 잡다한 일들은 전부 하인들이 했고,
안방마님은 평생 죽을 때까지 마을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창살 없는 감옥(監獄)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란 생각이 들어

이곳에 살던 여인들의 생이 참으로 측은하고 가엽고 한스럽게 느껴졌다.
지금도 당시 고뇌(苦惱) 깊었던

여인네들의 한숨 소리가 집안 곳곳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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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지난날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때

홍위병(紅衛兵)들이 파괴한 흔적이다.

그들은 지주계급(地主階級)이나 사상가(思想家)들을 철저하게 적대시 했는데,

신선(神仙)을 조각한 부분을 뜯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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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에 들어가니...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중국 방문 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부부로 부터

대형 그림을 선물받는 모습의 사진이 내부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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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黃山) 시내를 흘러가는 신안강(新安江)의 연밭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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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탑은 풍수탑(風水塔)이다.

휘주(徽州) 지역이 농토가 적은데도 가뭄이 심하여

주민들이 힘을 모아 하늘에 정성을 올리기 위해 쌓은 탑으로

큰 마을 입구에는 지금도 한 개 씩 남아있는 지역이 여럿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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