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넘고 섬진강을 건너서...
사성암(四聖庵)은
굽이치는 섬진강(蟾津江)을 경계로 하여
전라남도 구례읍을 마주보고 앉은 오산(鰲山) 절벽에
제비집처럼 붙은 암자(庵子)입니다.
이런 특이한 모습은
유명한 현공사(悬空寺)를 비롯한 중국에서는 흔한
가람(伽藍) 형태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섬진강을 바라보며 탁 트인 풍광 또한 수려하여
수행자(修行者) 뿐만 아니라
일반 여행객(旅行客)도 많이 찾는 절집입니다.
사성암(四聖庵)이 앉은 산이 "오산(鰲山)"이라고 하는데,
흔히 쓰는 글자가 아닌
"자라 오(鰲)"자를 쓴 것으로 보아
산의 형상이 섬진강 가에 앉은 "자라"를 닮아
붙여진 이름 같습니다.
오산 꼭대기에 올라 드론(Drone)을 날려
산의 모습을 확인하려 했지만...
완숙하지 못한 조작 미숙과 열기를 뿜어내는 무더위에
땀이 비오 듯 뿜어져 나와
잘 되질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산사(山寺) 사성암(四聖庵)은
서기 544년 백제 성왕(聖王) 22년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건립한 암자(庵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기조사(緣起祖師)는
인도(印度)에서 온 승려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그는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하고
화엄경(華嚴經)을 전파한 승려로 알려집니다.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연기조사(緣起祖師)는
신라 서라벌 황룡사(皇龍寺)에 적을 둔 승려였으며,
화엄사를 창건한 연대는 기록마다 판이하게 달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화엄경(華嚴經)을 필사(筆寫) 즉 옴겨 쓰고 활동했다는 연대가
통일신라 제 35대 경덕왕(景德王) 13년,
서기로 754년이란 것은
대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곳에 사성암(四聖庵)을 창건한 연대가
서기 544년 백제 성황(聖王) 22년이라고 하면...
그가 활동한 시대보다
약 200년 앞서서 이곳에 암자(庵子)를 지은 것이 됩니다.
이건, 앞 뒤가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간 전설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화엄경(華嚴經)이 알려진 것은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지 7년만인
서기 643년 선덕여왕(善德女王) 12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와서 강설(講說)한 이후
대중에게 유포되기 시작합니다.
화엄경(華嚴經)이 화엄사상(華嚴思想)으로 발전하며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화엄경(華嚴經)을 연구하고
화엄종(華嚴宗)을 창종(創宗)함에 따라 본격화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앞 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인도에서 왔다는 신비한 인물의 승려 "연기(烟起)"가
당시 백제 영토인 지리산에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하고 화엄사상(華嚴思想)을 설파했으며,
이곳 사성암(四聖庵)까지 지었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무리 묻고 따지지 않는
지난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합리적(合理的) 개연성(蓋然性)이 있어야
설득력(說得力)이 있습니다.
굳이 본질를 벗어난 껍데기를 가지고
물고 늘어지며 따져보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좀 텁텁한 뒤맛이 느껴지는 것은 어쪌수 없습니다.
아무튼 종교(宗敎)는 전설적 신비감이 너무나 강해
선듯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에,
신자(信者)들을 제외한 일반 대중은 이질적(異質的)으로 느껴져
거리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곳 산수 수려한 오산(鰲山)의 사성암(四聖庵)은
창건 당시는
"오산암(鰲山庵)"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그 후 신라의 원효(元曉), 도선(道詵), 의상(義湘)과
고려의 진각(眞覺), 등,
네 명의 고승(高僧)이 이 암자에서 수도하였다고 하여
후대(後代)에 "사성암(四聖庵)"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사성암(四聖庵)은
병든 중생(衆生)을 치유하고 구제하는
약사기도(藥師祈禱) 도량(道場)으로 이름을 날리며
천년 세월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늘씬한 긴 다리를 아래로 뻗고
깎아지른 절벽에 붙은 법당(法堂)이
특히 아름답고 신기하여 유명세를 더합니다.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즉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주불(主佛)로 모신
"유리광전(琉璃光殿)"입니다.
언듯 보면 작은 암자(庵子)인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바위 틈에 오밀조밀 자릴 잡은
자그마한 나한전(羅漢殿)과 산신당(山神堂) 등 부속 법당(法堂)들이
잘 갖추어진 절집입니다.
그리고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수도했다는 도선굴도 있어서
신비감을 더합니다.
구미 금오산 절벽에도
그가 수도한 도선굴이 있는데
도선(道詵)은 바위굴을 수행처로 특히 좋아했던 듯 합니다.
이곳 구례의 오산(鼇山)처럼
산수경치가 빼어나게 수려한 곳에는
어김없이 절집이 않아있습니다.
절집이 산으로 간 까닭은~?.
불교(佛敎)의 특성상 스스로를 깨우치고 닦는
참선(參禪)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적한 산속 만큼 좋은 장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禪宗)의 영향도 크다고 보여집니다.
처음 이땅에 불교가 전파 될 때는
도시의 민가에 사찰이 있었으나,
신라 말 당나라에서
선종(禪宗)이 전해지자
귀족들은 선종을 이단으로 거세게 몰아 붙였습니다.
이로서 선종은 수도에서 밀려나 지방을 근거로
선종 9산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깊은 산속에 사찰이 숨어들게 됩니다.
또한 조선시대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삼고
불교(佛敎)를 배척하는
억불정책(抑佛政策)의 영향도 큼니다.
세종(世宗) 때에는 전국에 36개 절만을 인정하고
그 외는
양반들의 유흥지(遊興地)로 이용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절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서원(書院)을 짓기도 했습니다.
결국 절은 더 깊은 산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사성암(四聖庵)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굽이치는 섬진강과
푸르고 넓은 구례 들녁...
이런 곳에 어찌 고승(高僧)이 나지 않겠습니까~?.
명산(名山)에는 명찰(名刹)이 들어서고...
명찰(名刹)에 명승(名僧)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부처님의 가호(加護)가 늘 함께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