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寒食)"의 유래...
개자추(介子推)의 발자취를 더듬다 !.
"면산(綿山)"의 기원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즉 기원전(紀元前: 770~ 403)년
진(晉)나라의 충신(忠臣) "개자추(介子推)"가
노모(老母)를 모시고 숨어 살던 곳이자,
그가 불에 타 죽은 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면산(綿山)을 달리 "개산(介山)"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부터 일찍이 명산으로 유명하여
도교사원(道敎寺院)인 도관(道觀)과
당시 세력을 떨치던 귀족들의
개인 사당(祠堂)이 여러개 지어졌으며,
면산 입구.
당(唐)나라 초기에 와서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불교(佛敎) 사찰(寺刹)이
면산(綿山)에 들어와 터를 잡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개자추(介子推) 동상.
이곳 면산(綿山)에는
14군데의 큰 명승지(名勝地)와,
60여개의 작은 명승지가 있을 정도로 산세가
가파르면서도 수려한 산입니다.
면산 기념관에 전시한 면산 미니어처.
널리 알려진 대라궁(大罗宫), 운봉사(雲峰祠), 정과사(正果寺)
그리고 개공사당(介公祠堂)을 비롯한
10여 곳의 경승지(景勝地)가
협곡을 중심로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습니다.
"한식(寒食)"이
이곳 면산에서 유래했기에,
그 기원(起源)의 현장을 직접 보고싶어 찾은 것이
면산(綿山)에 온 첫번째 이유입니다.
한식(寒食)을 낳게 한 인물
"개자추(介子推)"는 "개지추(介之推)"라고도 하며
서한(西漢)시대 그러니까 기원전 (202~ 기원후 8)에,
경학자(經學者) 유향(劉向)이 저술한 "열선전(列仙傳)"에 보면
그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성은 "왕(王)"이고 이름은 "광(光)"이라고 합니다.
중국 관광지는 어디를 가든
입구에서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목적지까지 들어가는 것이 기본이다.
당시, 그러니까
기원전 677년, 진(晉)나라의 "헌공(獻公)"이
"여희(驪姬)"라는 여인을 후첩(後妾)으로 두었는데...
여희(驪姬)가 전처(前妻)의 자식들을 밀어내고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진(晉)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교활한 꾀를 내어
전처의 소생인 태자(太子) "신생(申生)"을 죽입니다.
면산을 오르며 내려다보는 들판 풍경.
면산은 태항산맥 중에서도 고도가 높아 평균 해발 2,100m를 넘는다.
그리고는 둘째 아들인 "중이(重耳)"와 셋째 "이오(夷吾)"마저도
트집을 잡아 진나라에서 추방을 했는데,
이 때 개자추(介子推)는
둘째인 "중이(重耳)"를 주군(主君)으로 모시고 함께
망명생활을 시작합니다.
욕심과 야망이 큰 많은 여희(驪姬)는
장차 화근(禍根)의 싹을 자르기 위해,
둘째 아들 중이(重耳)마저 죽이려고 병사들을 사방으로 풀어
찾아내려 혈안이 됩니다.
쫓기게 된 중이(重耳) 일행은
겁에 질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면서
불안에 떨며 도망을 다닙니다.
그러던 어느날,
뱃가죽이 등에 붙어 죽을 것만 같았던 중이(重耳)가
"고깃국을 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하자,
이 험한 산속에서
고기를 구할 수 없는 형편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중이(重耳)를 따르던 측근들은 다들 난감해 합니다.
그러던 차,
갑자기 개자추(介子推)가 어디선가 고기를 구해 와
국을 끓여 중이(重耳)에게 바칩니다.
허겁지겁 고깃국을 맛있게 먹고 난 중이(重耳)가
"이토록 험한 산속에서 어떻게 고기를 구했냐"며 묻습니다.
이에 개자추(介子推)가 말하기를...
"고기를 구할 수가 없기에
자신의 허벅지살을 잘라 국을 끓였다"고 아룁니다.
중이(重耳)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합니다.
"훗날 내 이 고통을 벗어나 큰 뜻을 이루면,
반듯이 오늘의 이 고마움을 결코 잊지 않고
너에게 수백배로 보상하마" 라면서,
시뻘건 핏물이 흥건한 개자추의 허벅지를
바라보며 이를 갈며 맹세를 합니다.
개자추(介子推)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자른 것을 두고,
"허벅지 살을 베어 주군(主君)을 받든다"는 의미의
"할고봉군(割股奉君)"이란
고사성어(故事成語)는 여기서 생긴 말입니다.
절벽 잔도 같은 낭떨어지 벼랑길을 셔틀버스가 고개하 듯 아슬아슬 다닌다.
그렇게 19년 간을 산속에서 숨어 살던 중이(重耳)는
인접국 진목공(秦穆公)의 도움을 받아
진(晉)나라로 돌아와 나라를 물려받으니,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마지막 인물인 제 24대 "진문공(晉文公)"이 바로
"중이(重耳)"입니다.
그의 나이 62세의 고령에 군주(君主)가 된 것입니다.
당시는 군주(君主)를 "왕(王)"이라고 부르질 않고
"공(公)"이라고 칭하던 때입니다.
문공(文公)이 된 중이(重耳)는
방랑생활을 하며 자신의 곁에서 도움을 준 측근들에게
관직(官職)을 나누어 주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했는데,
가장 공이 큰 개자추(介子推)에게는
어쩐 일인지 관직(官職)을 내려주질 않았습니다~??.
이에 개자추(介子推)는 실망을 하며
어머니에게 이르길...
"문공(文公)이 군주(君主)의 자리에 오른 것은 하늘의 뜻이거늘...
관직(官職)을 제수받은
몇몇 측근들이 다 자신의 공로라고 떠벌리고 다니니...
그런 자들과 어찌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겠습니까~?."
개자추(介子推)가 숨어 다녔다는 서현곡 입구.
"따라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무도 찾지 못하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남은 생을 살고자 하니...
허락해 주십시요." 라고 말합니다.
노모(老母)도 이에 동의하여
이들 모자(母子)는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隱居)를 하니...
그들이 숨어 살았다는 곳이
이곳 "면산(綿山)" 일대입니다.
면산(綿山)에 숨어 살 때 고향 친구 "장해(張解)"가
친구가 노모(老母)를 모시고
깊은 산속에 은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걱정이 되어
물어 물어 어렵게 개자추(介子推)를 찾아옵니다.
이때 개자추(介子推)는 자신을 찾아온 친구에게
이곳에 오개 된 사연과,
지난날 중이(重耳)를 모시고 숨어 살면서
배고픈 중이(重耳)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국을 끓여 먹인 일 등을 차근차근 들려주며...
중이(重耳)가 군주(君主)가 되고 나서
논공행상(論功行賞) 때,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고
자기들 끼리 모든 관직(官職)을 나누어 가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 상
친구 장해(張解)는,
분노(憤怒)가 치밀어 화를 참치 못하고
그 길로 산을 박차고 내려가,
개자추(介子推)가 소외된 사연을 적은 여러 장의 벽보(壁報)를 만들어
저자 거리 곳곳에 붙이며
벡성들에게 알립니다.
개자추(介子推)를 까맣게 잊고 있던
진문공(晉文公)은,
저자 거리 곳곳에 붙은 벽보를
신하(臣下)들이 떼어가지고 온 뒤 자세히 보고서야...
자신의 큰 실수임를 크게 깨닫고는,
그제서야 개자추(介子推)를 떠올리며
병사들을 풀어 그의 행방을 찾아오라고
다급히 명을 내립니다.
얼마 후
개자추(介子推)가 면산(綿山) 어딘가에
노모(老母)와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몸소 면산(綿山)을 찾아와
개자추(介子推)를 애타게 부르며 찾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개자추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친구를 모신 개공사당.
이에 안타까워 하던 문공(文公)에게,
예전 도망다니며 고단한 생활을 할 때
개자추(介子推)가 자신의 허벅지살을 잘라 주공(主公)을 먹인 것을
질투하며 탐탁치 않게 여기던 측근들이
문공(文公)에게 한 가지 꽤를 내어 아룁니다.
"면산 3면에 불을 지르고
한 곳을 터주면
그곳으로 자추(子推)가 불을 피해 결국 나오고 말 것입니다."
자추(子推)가 산에서 내려오면 자신들 보다
높은 위치에 기용 될 것이 뻔하자...
이에 불안을 느끼고,
자추(子推)를 아에 불에 태워 죽이기 위해
교활한 꽤를 낸 것으로...
"3면에 만 불을 지른다고 아뢰고는
몰래 4면 모두에다 불을 지르면,
산에서 나오지 못하고 결국 불에 타 죽고 말 것"임을
서로 짜고서 거짓으로 아룁니다.
개자추(介子推)
효심(孝心)이 깊은 자추(子推)가
어머니를 모시고 반드시 나올 것이란 말에,
개자추 모친(母親)
묘책(妙策)이라고 탄복한 문공(主公)은
"면산(綿山) 3면에 어서 불을 지르라" 명하고는,
자추(子推)가 산속에서 내려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립니다.
개자추 친구 장해(張解).
3일 밤낮 동안 온 산을 다 태웠는데도
개자추(介子推)와 그의 노모(老母)는
왠일인지 내려오질 않았습니다.
3면이 아닌 4면 모두에
불을 질렀으니...
내려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3일 후 불이 꺼진 뒤
병사들을 풀어
면산(綿山)을 샅샅이 뒤지며 찾으니...
아뿔사~!
불에 탄 커다란 고목 밑에서
개자추(介子推) 모자(母者)가
서로 껴 안은 체 불에 타 죽은 처참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을 본 문공(文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회한(悔恨)의 눈물을 쏟아냅니다.
문공(文公)은 그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불 같은 명을 내립니다.
죽은 개자추 모자(母子)를 위해
"면산(綿山)을 개자추(介子推)의 땅으로 영원히 봉(奉)하며,"
지금부터 이 산의 이름을 개자추(介子推)의 이름을 딴
"개산(介山)으로 부르라" 명합니다.
그가 불에 타 죽은
음력 3월 초닷새부터 3일간은,
온 나라 오든 백성들을 비롯한 자신과 관리들 모두는
개자추(介子推)를 추모하는 뜻에서
불로 요리를 못하게 하고,
찬 음식을 먹게 했으니...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식(寒食)"의 유래입니다.
한식(寒食)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청명절(淸明節)"과는 하루 정도 늦거나 빠르기도 하나
대체적으로는 같은 날입니다.
이 날은 후손들이 모여 조상(祖上)의 산소를 찾아 제(祭)를 지내기도 하고
묘지를 돌보기도 합니다.
이후 문공(文公)은,
깊이 자책하며 반성하는 뜻에서
불에 탄 면산(綿山)의 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 다녔는데...
걸을 때마다 발 밑에서 나는 달그락 소리를 들으며
자추(子推)의 깊은 충심(忠心)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한 친구를 부를 때 "족하(足下)"라 하는데,
이는 여기서 유래한 말입니다.
나는 "한식(寒食)"의 유래와
개자추(介子推)의 절개(節介),
깊은 충심(忠心)과 효심(孝心),
그리고 절벽에 들어선 웅장하고 신비한 고건축물(古建築物)들을
면산(綿山)에 와서 꼭 보고싶었습니다.
태항산맥(太行山脈) 중에서 가장 오지의 협곡인
이곳 면산(綿山)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험난한 산이기에
아슬아슬 절벽 틈에 날아갈 듯 지어진 매혹적인 건물들이
비교적 잘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면산(綿山) 골짜기 바위틈에는
도교(道敎)와 불교(佛敎)를 대표하는
멋진 사원(祠院)들이 웅장한 모습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조화를 이루며 서 있습니다.
펑평하고 드넓은 땅을 두고서
하필이면,
처마 끝의 제비집처럼
이런 위태롭고 위험천만한 절벽 틈에다 사원(祠院)들을 지었을까~??.
나는 지금도 그것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원들을 돌아보는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깨달음은 도데체 무엇이고...
버리는 것은 또 무엇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지...??.
나는 지금도 그 단순한 뜻을 알지 못합니다...
어느 훌륭하신 분이 쓴 글에서...
"삶은 한조각 구름이 이는 것이요...
죽음은 한조각 뜬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덧없는 삶을
우리는 왜,
매일 같이 긴장 속에 악을 쓰며 살고있는 것일까요~??.
내가 꿈꾸는 내 안의 자유(自由)는...
모자람 없이 풍요롭고 넉넉함을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마음을 펼쳐놓을 작은 공간이면 충분한데...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내가 이곳 오지(奧地) 중 오지인,
태항산맥(太行山脈) 중에서도 면산(綿山)을 찾은 것은
나도 모르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낯선 곳에서 느끼는
새털처럼 가볍고 홀가분한 자유(自由)를
잠시나마 느끼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도 헤봅니다...
짧은 여행 중,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웅장함과
가파른 산비탈 바위틈에 지어진
인간(人間)의 간절한 신앙심(信仰心)이 이룩한 위대한 문명(文明)의 흔적들을 배경으로,
몇 개의 주제로 나누어
사진으로 나마 짤막하게 소개을 이어갈까 합니다...^^.